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 침공 (문단 편집) ==== 나르비크 해전 ==== 나르비크 지역은 애초부터 연합군이 상정한 중요 목표지역이었으므로 개전 초기부터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이 진행되었다. 4월 10일, '''제1차 나르비크 해전'''이 벌어졌다. 영국 해군은 워버턴리(Warburton-Lee) 대령의 지휘하에 기함인 구축함 하디와 역시 구축함인 해복크, 헌터, 핫스퍼, 호스틸로 구성된 총계 구축함 5척이라는 빈약한 전력으로 교전에 임하여 나르비크 항에서 하역 작업 중이던 독일군 침공함대를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구축함 2척, 탄약보급함 1척, 수송함 6척이 격침되었고 구축함 4척이 중파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구축함 하디와 헌터 2척이 격침되었고,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의 손실이 엄청났지만 영국군의 경우에도 해당 구축함들은 H형 구축함 전대로 리나운과 함께 와서 기뢰부설 구축함을 지키고, 샤른호르스트급 전함과 교전을 벌인 정예 구축함 부대인데다가 하디는 처음부터 4.5인치 양용포를 1문 장비한 단장포를 다른 H형보다 하나 더 많은 5개를 장착했던, 구축함 전대의 기함으로 만들어진 2척 뿐인 정예함이었다. 하지만 격침되면서 워버턴 리 대령도 전사해서, 영국 해군에게는 물적•인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뼈아픈 손실이었다. 해전의 양상은 영국군의 기습이 먹혀들어가서 초반에 독일 기함인 빌헬름 하이트캄프가 명중탄을 맞고 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나르비크 항구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기습 후 빠져나가다가 근처 피오르를 지키던 다른 독일군의 함대를 만나서 손실을 입은 것이었으며, 후퇴하던 영국 함대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탄약보급함을 포격해서 굉침시키기까지 했으므로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나 이건 약과에 불과했다. 4월 13일, '''제2차 나르비크 해전'''이 일어난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를 기함으로 하여, 9척의 구축함과 항공모함 퓨리어스로 구성된 영국군 함대가 다시 나르비크로 몰려왔고, 독일군은 보유 구축함 8척과 U-보트 1척을 잃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전함 워스파이트는 항모 퓨리어스의 함재기 원호하에 [[트라이벌급 구축함]] 4척을 포함한 구축함 9척을 선두에 세워서 나르비크 항구가 있는 피오르 최심부까지 진격했다. 워스파이트는 이 과정에서 정찰기로 보유한 수상기 개조형 페어리 소드피쉬(L9767)를 직접 띄웠는데, 이 함재기가 U-64를 350파운드 폭탄을 명중시킨뒤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어서 격침시켰다. 덕분에 U-64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전함의 공습'''으로 격침된 유일한 함선이라는 진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원래 워스파이트는 해안포 진지를 박살내는 것이 주임무였으나, 나르비크 주변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투 이후에 포대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나르비크 항의 시설까지 전부 주포로 박살내버리고 갔다.] 저항하는 독일 구축함을 상대로 15인치 주포탄을 퍼부어 일방적인 대타격을 주었다. 독일군도 나름대로 저항을 시도했다. [[1934년형 구축함|Z13 Erich Koellner]]은 제1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심한 손상을 입었지만 제일 먼저 도착해서 반격을 하려고 했는데, 워스파이트의 페어리 소드피쉬에 발각되어 전함의 주포와 구축함의 어뢰 세례를 받고 격침되었다. 이때 워스파이트는 15인치 주포를 그냥 철갑탄으로 장전하고 냅다 쏴버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도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관통했지만 구멍이 하나 생길 때마다 구축함의 함선 구조 그 자체가 파괴되어 가면서 눈에 띄게 기울어져 갔다고 한다. 결국 Z13은 총알 한 발 못쏜 채로 대파된 상태에서 폭뢰를 터트려서 자침했다. 뒤이어 독일 구축함 4척(Z9, [[1934년형 구축함|Z11 Bernd von Arnim]], Z18, Z19)이 저항을 시도했으며, 결과적으로 [[트라이벌급 구축함|HMS 베두인(Bedouin)]]에게 미미한 손상을 입혔다. [[1934년형 구축함|Z9 Wolfgang Zenker]] 함은 매복하고 있다가 워스파이트에게 뇌격을 해서 명중코스로 집어넣었으나, [[어뢰 스캔들|잠수함들이 겪은 어뢰의 신뢰성 문제]]는 구축함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명중할거 같았던 어뢰는 워스파이트의 용골 아래를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뇌격이 독일군이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독일 구축함들은 전함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구축함에게로 포를 돌렸는데, [[1936년형 구축함|Z19 Hermann Künne]]처럼 [[트라이벌급 구축함|HMS 에스키모(Eskimo)]]에게 행한 공격이 빗나간 후, 도망가서 자침을 시도하다가 에스키모의 뇌격으로 산산조각나기도 하고[* 다만 자침이 꽤 진행된 상태여서, 침몰 원인이 뇌격인 것으로 보진 않는다.], [[1934년형 구축함|Z2 Georg Thiele]]과 [[1936년형 구축함|Z18 Hans Lüdemann]]처럼 에스키모 한 척을 집중 공격해보기도 했으며, [[1936년형 구축함|Z17 Diether von Roeder]]와 [[1934년형 구축함|Z12 Erich Giese]]처럼 제1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엔진 손상을 입어 항구에 정박중인 상태에서 [[트라이벌급 구축함|HMS 펀자비(Punjabi) 및 HMS 코삭(Cossack)]]에게 미미한 손상을 주는 포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3척의 독일 구축함(Z12, Z13, Z17)이 워스파이트와 트라이벌급 구축함들의 협공으로 격침되고, Z19이 자침한 뒤, 나머지 4척의 독일 구축함들(Z2, Z9, Z11, Z18)은 상술한 방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저항하다가 롬박스피요르(Rombaksfjord)로 후퇴한 뒤 전부 자침해서 가라앉고 말았다. 글로우웜과 교전했던 Z11, Z18도 이 전투에서 둘 다 가라앉고 만다. 이 전투 끝에 독일군이 나르비크에 두었던 함선 중에서 격침당하지 않은 것은 잠수함 U-51 단 한 척이었으며, 8척의 구축함, 1척의 유보트, 함 승조원 1,000여 명(전사자만)을 이 전투 한 번에 모두 잃었다. 격침된 구축함에서 생존한 승조원들은 [[해군 육전대]]로 편성되어 육군 산악사단 예하에 배속돼 지상전을 치렀다. 이들은 급히 상륙하느라 피복도 남색의 해군 [[근무복]]을 그대로 입거나 노획한 노르웨이 육군의 전투복을 착용해야 했고, 병기 역시 상당수는 현지에서 노획한 노르웨이 육군의 것들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육군의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잘 싸웠기에, 이들이 육군 산악사단에 배속됐단 뜻으로 모자 왼쪽에 [[에델바이스]] 휘장[* 육군 및 SS의 산악부대원들은 선발된 뒤 [[알프스 산맥]]에서 혹독한 산악전 교육을 이수해야 산악모 왼쪽에 이 철제 꽃모양 휘장을 달 수 있었다. 이들의 자부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관련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비 산악부대원의 패용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을 달고 다니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영국군은 집중 공격당한 HMS 에스키모의 수리가 필요해서 나르비크에 잠시 머물러야 했고, 항모 퓨리어스가 2대의 항공기를 잃은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손실을 입지 않았다. 독일 해군은 작전 성공 이후 돌아가는 워스파이트를 격침시키기 위해 4월 13일과 14일에 U-46, U-48을 각각 보내서 뇌격하는데, 이때도 어뢰의 신뢰성 문제로 격침에 실패했다. 13일에 암살자로 등판했던 U-46은 워스파이트를 호위하는 구축함들의 폭뢰 공격으로 죽다 살아났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북부의 제해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나르비크에서의 두 차례의 해전으로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 이상을 날려먹어(…) 더 이상의 해상작전이 곤란한 지경에 내몰렸으며, 영국은 확보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추가 작전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추가작전이란 기존의 윌프레드, R4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가 먼저 독일의 침공을 받은 이상 영국은 거리낌없이 나르비크를 파괴할 명분이 생겨버렸다. 그리하여 4월 14일, 최초의 영국군이 나르비크에 도착했다. 하지만 육상 병력의 배치가 끝난 4월 16일부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진격이 정체되었을 뿐 아니라, 24여단도 설원에서의 전투에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트론헤임 방면의 파멸이 확실해지고 윈스턴 처칠이 노발대발하기 시작한 4월 24일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시계가 5m도 안되는 눈보라에서는 진격하기는커녕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진격은 정지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폭설은 노르웨이군에게도 대재앙이라서 해발 400m의 라파우겐 산을 항해 진격을 개시한 노르웨이군 제 6사단은 3km 전진에 15시간을 소모해야 했고, 결국 독일군 방어진지까지 근접했을 때는 이미 손가락도 까딱하기 어려운 상태로 탈진했으므로 제대로 된 전투도 거의 없이 상당수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물론 날씨와는 관계없이 나르비크 주변의 수역은 영국 해군이 꽉 잡고 있었지만, 육상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함포 사격을 해야 하는데 적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는 상황이라서 3시간의 함포 사격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나마 맥케이시 소장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추가적인 함포 사격이 중지되었다. 4월 27일에는 프랑스 원정군이 결성되었으며 여기에 망명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3국 연합군이 만들어졌다. 이들 병력을 합하면 25,000여 명에 육박했으므로 연합군은 다시 한번 나르비크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적설량이 1.5m에 육박하는데다가, 약 4,600명인 독일군 산악부대의 저항에 직면한 나머지 전진속도는 하루에 500m 이하로 떨어졌으며 설맹(雪盲) 환자까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부와 중부를 석권한 독일군이 북부로 빠르게 진격중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독일 공군의 행동반경이 영국 함대를 위협하면서 추가작전이 점점 더 어려워져 노르웨이 전역은 사실상 패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5월 10일에는 원정군 사령관이 [[클로드 오킨렉]]으로 교체되었다. 오킨렉은 약화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나르비크에 진군하여 5월 27일에는 나르비크를 점령하고 있었던 독일군을 몰아냈다. 물론 독일 지상군은 1•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의 패배로 해상보급이 끊긴 상태였던지라 결국 패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병력을 어느 정도 보전하고 있었던데다가 나르비크 주변 산악지대를 장악한 상황이라서 설원에서의 산악전투는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면서 나르비크 전투는 잊혀 버렸고, 해군 병력이 노르웨이에서 대부분 철수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나르비크를 영구적으로 확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결국 나르비크를 간신히 점령했으나, 1940년 6월 6일에 원정군의 마지막 병력이 철수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루거 장군을 비롯한 노르웨이군의 잔존 병력은 1940년 6월 9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